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누일 1세 (문단 편집) === [[마누일 1세의 남이탈리아 원정|이탈리아 원정]] === [[2차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을 통과하던 1147년, 황제가 십자군에 집중하는 틈을 노려 [[시칠리아 왕국]]의 로지에르 2세는 [[코르푸]] 섬을 점령하고 [[테베]]와 [[코린토스]]를 약탈했다. 1148년에도 십자군은 물론 제국 북변을 침탈하는 유목민 등 여러 문제 때문에 황제는 섣불리 군사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다. 1148년 후반에 이르러서야 마누일 1세는 [[콘라트 3세]]와 동맹을 맺는데 성공했고, 제국의 동맹이었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원을 받아 1149년에 코르푸 섬을 탈환할 수 있었다. 십자군 문제가 대강 정리되자 황제의 관심은 서쪽으로 향했다. 남이탈리아는 제국의 고토이자 서유럽에 영향력을 투사하는 창구였으며, 동시에 제국의 적들에게는 [[아드리아 해]]를 건너 제국 서부를 공격하기 좋은 교두보였다. 당장 마누일의 조부인 [[알렉시오스 1세]]는 시칠리아의 노르만인들과 여러차례의 전면전을 벌인 바 있었고, 그들의 후손은 이제 왕국을 세워 서유럽의 국가들에게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자며 제국에 대한 악의적인 비방을 하고있었다. 마침 1154년 2월에 로지에르 2세가 죽자, 원정전의 대대적인 '밑작업'이 시작되었다. 먼저 서방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삼촌 콘라트 3세와 맺었던 동맹을 상기시켰다.[* 다만, 당시 프리드리히 1세는 1153년에 교황청과 비밀 조약을 맺어 노르만 왕조와 동로마 제국을 견제하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은 동로마 제국의 원정 당시 약속한 지원을 하지 않았다.] 동시에 외교관과 요원들이 파견되어 현지의 귀족 및 도시와 접촉하여 엄청난 금을 뿌렸고, 충성을 맹세받음은 물론 미래의 협조까지 약속받는데 성공했다. 마지막으로는 [[교황청]]에도 접근했다. 갈수록 통제하기 어려운 '야만적인' [[시칠리아 왕국]]과, 막강한 권위를 갖추고 오랜 친교를 맺고 있었던 '문명화된' 제국을 대조시키며 교황과 그 신하들을 구워삶았다. 착수금으로 많은 금이 건네졌으며, 성공했을 때의 더 많은 금 역시 약속되었다. 1155년, 마침내 동로마군의 본격적인 원정이 개시되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상 지원이 뒤를 따랐고, 노르만인들에게 이질감을 느끼고 제국을 그리워하던 토착 귀족들은 이에 호응했다. 오트빌 왕실을 싫어했던 노르만계 귀족들도 제국의 자금에 흔들려 협조적인 자세였다. 1만 ~ 2만으로 추산되는 동로마군은 옛 남이탈리아 총독부가 있던 바리(Bari)에 상륙했고, 미리 해놓은 밑작업 덕분에 손쉽게 동부 해안 일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1155년 말에 이르면 시칠리아 섬을 제외한 남이탈리아 대부분이 동로마 제국 밑으로 들어왔고, 원정은 성공하는 듯 했다. 그러나 반격은 이듬해 봄부터 시작됐다. 시칠리아의 1만 2천 보병과 5천의 기사대는 두 배가 넘는 수의 아풀리아의 동로마계 반란군들에 맞서 연승을 거둬 전황을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원정군 지휘부도 내분으로 갈팡질팡하며 실책을 연발했고, 거듭된 실패로 현지 세력도 점차 비협조적으로 변해갔다. 마침내 브린디시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자 동로마군은 아드리아 해를 건너 그리스로 퇴각했고, 로지에르는 반란의 씨앗을 자르기 위해 옛 동로마계 반란군 잔당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남부 이탈리아에서의 동로마의 영향력은 급속하게 지워졌고,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청의 협조적인 움직임도 없었다. 기록된 것만 216만 전의 금화를 소모한 이탈리아 원정은 이렇게 1년 만에 엉망진창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